오르세 작품 설명
▶오르낭의 장례식 -귀스타프 쿠르베 1849~1850 캔버스의 유화. 쿠르베와 오르낭
쿠르베는 19세기 사실주의 미술의 최고의 거장이다. 밀레나 도미에 같은 훌륭한 사실주의 예술가들도 있지만 이 사조의 맨 앞자리는 늘 쿠르베의 차지이다. 그는 "나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이 경험하고 확인한 것만을 그렸다. 기독교 소재와 신화소재는 물론이고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표현했던 동방과 고대의 풍경 또한 그에게는 허황되고 거짓된 것이었다. 19세기의 사실주의는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합리적 .과학적 접근" 을 중시하는 철저히 현실에 밀착된 예술이었다. 전통적.고전적 가치가 지녀온 이상과 시적 낭만을 배척하고 예술 속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렇기에 그 대표자인 쿠르베는 그만큼 현실과 싸우던 간 "현실의 예술가" 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감상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에술이란 결국 시는 사라지고 현실만 남은 예술이었을 것이다. 예술가로써 그의 이같은 "현실밀착"은 결국 당대의 정치적 격동으로 내몰기도 했다. "나는 사회주의자 일뿐 아니라,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이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의 지지자이며 무엇보다도 사실주의자, 곧 진실의 참다운 벗이다." 1851년 한 편지에 이 같이 적어 놓은 그는 20년 뒤 파리코뮌의 예술위원회 의장으로 나폴레옹 주의의 상징인 방돔 기둥철거를 제안했고 국민 방위대에 대포를 기증하는 등 철저히 혁명 세력의 편에 서서 보수 기득권 층과 맞섰다. 이것이 빌미가 되 파리 코민이 붕괴된 뒤 옥살이까지 하게 된 그는 1873년 결국 스위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치게 된다.
▶화가의 아틀리에 ( Latelier du peintre) -귀스타프 쿠르베
부제가 "화가의 아틀리에, 7년 동안 이루어진 내 예술적 윤리적 삶에 대한 사실적 비유" 라는 원제를 담고 있다. 이 부제도 이 작품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그다지 명료하게 밝혀주지 않는다.그래도 그가 1854년 가을 상플뢰리 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 이 작품은 내 아틀리에의 정신적, 육체적 이야기 라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나를 도와주고 내 생각을 지지하고 내 행동에 동참하는 사람들로 삶과 죽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지. 이것은 상층계급과 중층계급, 하층계급의 사회라네 한마디로 욕망과 정열 속에서 몸부림치는 현실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방식이지. 이것은 회화로 재현되기 위해서 나의 아틀리에에 다가온 세계라네" 이어 쿠르베는 작품을 세밀히 설명하기 까지 한다.
"그림 중앙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게 바로 나라네. 오른쪽에는 나의 후원자들이 있어. 친구들, 노동자들, 예술 애호가들이 바로 그들이지. 왼쪽은 이와 다른 다른 범속한 삶의 세계이네. 민중, 가난, 빈곤, 착취당하는 자들 죽음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지" 화폭 오른쪽의 신원, 특히 보들레르, 상플뢰리, 프루동 등은 누구나 쉽게알아 볼 수 있으나 왼쪽 인물들의 정체성은 훨씬 불확실해서 이 그림의 실제 의미에 관해 여러 가지 추측과 상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화가의 아틀리에 ( Latelier du peintre) -귀스타프 쿠르베
부제가 "화가의 아틀리에, 7년 동안 이루어진 내 예술적 윤리적 삶에 대한 사실적 비유" 라는 원제를 담고 있다. 이 부제도 이 작품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그다지 명료하게 밝혀주지 않는다.그래도 그가 1854년 가을 상플뢰리 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 이 작품은 내 아틀리에의 정신적, 육체적 이야기 라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나를 도와주고 내 생각을 지지하고 내 행동에 동참하는 사람들로 삶과 죽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지. 이것은 상층계급과 중층계급, 하층계급의 사회라네 한마디로 욕망과 정열 속에서 몸부림치는 현실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방식이지. 이것은 회화로 재현되기 위해서 나의 아틀리에에 다가온 세계라네" 이어 쿠르베는 작품을 세밀히 설명하기 까지 한다.
"그림 중앙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게 바로 나라네. 오른쪽에는 나의 후원자들이 있어. 친구들, 노동자들, 예술 애호가들이 바로 그들이지. 왼쪽은 이와 다른 다른 범속한 삶의 세계이네. 민중, 가난, 빈곤, 착취당하는 자들 죽음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지" 화폭 오른쪽의 신원, 특히 보들레르, 상플뢰리, 프루동 등은 누구나 쉽게알아 볼 수 있으나 왼쪽 인물들의 정체성은 훨씬 불확실해서 이 그림의 실제 의미에 관해 여러 가지 추측과 상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올랭피아 ( L Olympia 1865년) -에두아르 마네 (캔버스에 유채,130.5x190cm)
마네가 1865년 이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하자 심사위원회는 또 다른 "낙선 살롱전"의 개최를 두려워하여 이를 받아 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결코 이상적인 미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없는 나체여인 흑인여자의 기이한 등장, 그리고 고양이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스캔들을 불러 일으키며 "고릴라 같은 올랭피아" "배가 누렇게 그려진 오달리스크" 등의 악평을 들어야만 했다. 이 작품은 회화정신의 측면에서 고야로부터 그 영감을 받았다고 하나 그 전체 구도와 모델의 자세는 띠띠앵의 (도시의 비너스)에서 빌어와 흰색, 상아색, 분홍색 그리고 검정색 등의 색채의 강렬한 대비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마네는 죽을 때까지 이 화폭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대표작으로 간주하였다. 인상파의 정신적 지주이며 모태인 마네가 프랑스 화단을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떠들썩하게 만든 두 작품 중 가장 거센 비난과 수모를 당한 작품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혁신적인 "올랭피아"는 서양회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잇고 있다. 전체적인 모티브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으며 모델의 오만한 자세는 고야의 "나체의 마하" 자세를 따르고 있다. 다만 우르비노의 시녀를 흑인하녀로, 강아지를 고양이로 대체했으며, 원근법에 의한 백경의 방을 없앴을 뿐이다. 이러한 작품에서 우리는 조화로운 고전적 구도와 상아빛이 도는 백색피부, 몇 개의 거친 터치로 그려진 꽃다발의 참신한 기법, 올랭피아의 리본과 꽃 그리고 쇼올의 꽃무늬가 상응하여 만드는 아름다움과 밀도 높은 배경의 멋진 조화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살롱에 출품된 이 걸작이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 -종교화 위에 걸려서 우산이나 지팡이로 찔리고, 돌팔매를 당해야 했을까?
▶ 이삭줍는 여인들 -장 프랑수와 밀레 (캔버스에 유채, 83.5x111cm, 1867년)
"만종"과 더불어 밀레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둘 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두 작품의 공통된 특징은 지평선이 높게 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콘스타블이 하늘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면, 밀레는 대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몇 장의 밑그림을 그린 끝에 완성한 역작 "이삭줍기"에서 절제된 색과 구도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자칫 산만해져 버릴 수 있는 광경을 17세기 네델란드 화파에서 배운 차분하고 아름다운 색채와 연관성 있는 구도(오른쪽의 허리를 편 아낙의 등선은 맨 왼쪽의 아낙과 이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연결선은 지평선과 교묘히 연결되어 있다.)는 자연과 사람을 하나로 이루면서 전체적인 안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여기에는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으며 줄거리도 없다. 다만 세 명의 농부들이 추수가 한창인 넓은 들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이 농촌 여인들은 천천히 육중하게 움직이면서 완전히 일에 열중하고 있다. 밀레는 이들의 건장하고 튼튼한 체격과 신중한 움직임을 강조하는데 전념했다. 그는 인물의 윤곽선을 단순하고도 견고하게 묘사했으며 이를 눈부신 햇살이 내리비치는 들판과 대비시켰다. 이렇게 해서 세 명의 농촌 아낙들은 아카데미 파의 그림에 등장하는 영웅보다 오히려 더 그럴듯한 자연스러운 품위를 지니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 허술한 듯한 구성은 고요한 균형감을 지탱해 주고 있다. 인물들의 움직임과 배치는 계산된 리듬에 따른 것이며 이것이 전체 구성에 안정감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화가가 이 장면을 얼마나 엄숙한 것으로 보았는지 느끼게 해준다.
▶ 만종 (Angelus) 밀레 (캔버스에 유채,55.5x66cm, 1857~59)
(만종)은 그의 어린시절 신앙의 추억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만종)은 내가 옛날 일을 떠 올리며 그린 그림이라네. 옛날, 우리가 밭에서 일할때 저녁종 소리가 들리면 우리 할머니는 한번 도 잊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일을 멈추게 한 후 꼬박 꼬박 삼종기도(오전,정오,오후 종소리에 맞춰 하루에 세번 드리는 기도) 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게 하셨지." 농민 화가라고 불리웠던 밀레의 만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만큼이나 잘 알려진 작품으로 루브르 박물관의 화상이었던 쇼가르가 구입, 루브르에 기증했으며 1986년 오르세 박물관 개장과 함께 옮겨 온 것이다. 단순, 소박하게 그려진 마치 조각의 입상을 연상시키는 두 인물에서 정적인 경건함을 느낄 수 있다.
두 인물이 화면 윗 부분의 밝은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멀리 지평선을 향해 바다처럼 펼쳐지는 대지위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강한 이미지의 표현은 산업화의 도래로 인한 19세기 중반 이후의 자연과 농촌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들녁에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부부의 모습은 동네 이발소나 복덕방에서도 쉽게 볼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그림이다. 프랑스 농촌의 여성들의 강인함과 인내심은 밀레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는 아내 쪽에만 빛이 비춰지고 남편은 그늘 속에서 그 존재가 희박하게 그려져 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에두아르 마네 (캔버스에 유채, 208x264cm, 1863)
1863년 5월, 파리 시내의 "낙선된 그림전"이다. 그해 살롱전에서 떨어진 그림들에 대해 말이 많아지자 나폴레옹 3세는 심사에서 떨어진 그림들을 한곳에 모아 전시하게 했다.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으로 "오랭피아"와 같은 해에 그려졌다. 일반 여성의 나체를 등장시킨 주제의 대담성, 이행과정이 없는 대담한 명암, 평명적 색채, 원근법의 무시 등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림 속에서 중앙의 인물이 아내 수잔느의 오빠이며 다른 한 사람은 마네의 형제이다. 나체의 여인은 마네가 즐겨 그린 모델인데 그림 속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이제 막 옷을 입으려는 누드모델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우리의 연상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격분한 당시 비평가는 "간신히 가릴 곳만 가린 매춘부가 있는 대로 멋을 부린 두 신사 사이에서 안면몰수하고 칠칠치 못한 자세로 앉아 있다"라고 했다. <풀밭 위의 점심>은 스캔들을 일으킨 문제작이었다. 그는 1863년 살롱전에 처음에는 <목욕>이란 제목으로 출품했으나 낙선했다. 기대고 누워 있는 사나이가 쓰고 있는 모자는 당시 파리 대학의 학생모 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낮에 공원에 와서 옷을 모두 벗고, 과일 바구니를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앉아 있는 여인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수줍기는 고사하고 뻔뻔스럽게 누군가를 쳐다보는 값싼 표정이며, 어깨에 붙어 버린 짧은 목이며, 접힌 아랫배며, 한 사나이의 가랑이 사이에 남자 같은 다리와 마당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양이 당시 파리인들 에게는 버릇없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속옷만 입은 여자가 물에 반쯤 쭈그리고 앉아 있는 배경은 당시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